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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평신도 희년' 기념 독후감 공모 우수상작(지용준 요셉)
첨부 작성일 2018-11-08 조회 260

우수상 : 지용준 요셉(인천교구, 선학동성당)

 

순교자, 하느님의 뜻을 현세에서 실현한 이들

 

. 치명자산 앞에서 - 순교는 강요된 폭력인가?

  전주에는 치명자산, 전동성당을 비롯한 천주교 유적도 많지만, 유교 문화 연구소, 향교처럼 유교 유적도 많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2014년에 유교 문화를 배우고자 전주에 연수차 갔었다. 그런데 유학전공인 한 교수님께서 치명자산을 가리키며, ‘전주에는 유교유산 외에도, 치명자산처럼 천주교 혹은 천주교 순교자와 연관된 유산도 많다. 천주교에서 기리는 순교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로, 올해는 특히 교황께서 방한하셔서, 이 순교자들을 기리는 행사를 광화문에서 했다. 그러나 이처럼 가톨릭이 순교자를 기리는 것은 순교자들처럼 작금의 신자들도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며, 이는 일종의 강요된 폭력을 신자들에게 암묵적으로 전승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교회가 과연 순교자들의 행적을 발굴하고, 기념하는 것이 과연 강요된 폭력을 신자들에게 전승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으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위 물음에 대한 답을 초남이 동정 부부에서 비로소 찾았다. 이제 그 답을 찾으러, 초남이 부부가 오른 치명자산을 오르듯, 천천히 따라가 보자.

   

. 산을 오르며 - 부모님에게서 어렴풋이 느낀 하느님의 사랑

 처음에 초남이 부부는 어떤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이 계기는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의 가정환경에서 엿볼 수 있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살던 조선은 유교 국가로, 조선의 통치자들은 삼강(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을 비롯한 유교 윤리의 실천을 백성들에게 강조해왔다. 그 삼강 가운데 부위자강은 자식은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라는 말이다. 결국 조선 사회는 경제적 측면과 아울러 윤리적 측면에서도 부모가 자식보다 위에 있어, 부모와 자식 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강조되어, 부모의 명령과 뜻을 무조건 받드는 것이 도리로 여겨진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순종을 중시했지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역할에 대해서는 경시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천주교회는 부모 자식 상호 간의 사랑을 모두 강조하였고, 특히 조선 사회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예컨대, 달레 신부는 이 루갈다의 부모에 대해, “그녀의 어머니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기르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이 루갈다는 덕이 많은 어머니의 보살핌에 응하여, 그의 모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바쳐졌으며, 그 외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았다밝혔다. 이런 대목을 보면,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은 어렸을 때, 여타 가정과 달리 부모님이 자신을 존중해 주는 가정환경에서 유년을 보냈을 것이다. 이러한 각자의 가정환경에서, 사람은 부모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육친과 자신에게 베푸시는 그 큰 사랑을 어렴풋이 느끼고, 그 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했을 것이다. 이후 그들의 순교 역시, 부모님을 보살펴주는 분이자 또 하나의 부모인 하느님을 변절할 수 없었기에, 자녀로서 효를 행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순교를 택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초남이 동정 부부는 결혼한 뒤, 하느님께만 효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육친, 아울러 형제자매에게도, 심지어 인척인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등 하느님께서 두 부부에게 어렸을 때부터 베푸신 사랑을 나눠주고자 했다. 나는 이러한 부부의 가정환경을 보고,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신앙인, 올바른 인격을 가진 이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정에서 자녀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단지 복음을 읽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가 일상에서 자녀에게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의 가정환경은 앞으로 내가 만일 결혼하여 자녀가 생긴다면,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자녀를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 산꼭대기에서 - 신분제도 하에서 평등을 오롯이 실현한 동정 부부의 삶

 초남이 부부가 지킨 동정은 단순히 출산,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이 받은 몸을 오롯이 봉헌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은 동정과 순교로서 자신의 신체만 오롯이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도 오롯이실현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보여준 남녀 사이, 신분을 뛰어넘는 평등관은 데이트 폭력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갑질 문화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도 큰 감명을 준다.

 아내인 이순이 루간다는 남편인 유중철 요한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편을 요안(요한) 오라버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유중철 요한의 서한은 남아 있지 않으나, 문헌에 따르면, 순교 당시 입고 있던 옷에서, ‘누이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글귀를 적어, 아내인 루갈다를 누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은 부부를 수직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삶의 반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부부애는 가부장제 문화가 만연했던 당시 선 후기 세태와는 거리가 먼 것이요, 시대를 초월한 발상이었다. 나는 이들 부부의 부부애 보며, 연애에서도 나에게 상대방을 동반자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고, 이들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지금 청년들 사이에 퍼진 연인 간 폭력인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는 데 하나의 방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들 부부의 삶을 보며 부부는 동반자로서 평생 가는 존재로,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결혼은 어려운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초남이 부부가 보여준 신분 간의 벽을 극복했던 것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당시 우리 교인들은 천주애인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표상이며, 든 이를 형제처럼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 부부 역시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여, 노비들을 천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과 같은 방에서 교리를 익혔다. 이러한 부부의 행적은 세례받은 이들 가운데, 초남이 부부의 노비들도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초남이 부부의 평등관은, 우리가 나보다 열위에 있는 자를 업신여기는, 소위 갑질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신앙인인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전하신, ‘천주애인’,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다시금 우리의 가치관으로 재정립해야 함을 배울 수 있었다.

   

. 산에서 내려오며 - 우리 시대에 순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초남이 동정 부부라는 책을 덮으며, 나는 처음에 가졌던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초남이 부부는 부모님을 이끄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또 다른 부모님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는 배교하지 않으면, 즉 부모님을 저버리지 않으면, 신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지금이나 조선 사회나 두 람 입장에서는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변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에, 이들이 부모님인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러한 입장을 고려해보면, 들이 하느님을 믿은 것은 이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행해진 것이고, 순교 역시 이들이 자기 뜻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순교를 순교자들에게 가해진 압력,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이들을 기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이들의 삶을 공경하는 것 역시 교회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인지가 문제 된다. 만약,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하느님의 뜻이 단지 종교 지도자로서 하느님의 뜻에 불과하고, 그것이 사회와 개인에 해로운 가치라면, 종교가 이에 변절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은 종교를 앞세워 특정 집단이 타인에게 특정 가치만을 강요하는, 강요된 폭력일 것이다. 그러나 초남이 부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가 종교적 가치를 넘어, 그것이 사회와 개인이 지녀야 할 옳은 가치이기 때문에 몸을 바쳐가며 그것을 지켰다. 당시 우리 교인들은 자녀와 부모 간의 수직적 관계를 타파하고, 신분제를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몸소 실천하였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점에서, 초남이 부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은 신분에 따라 평등하게 사는 것, 남녀가 동등한 삶을 누리는 것을 추구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평등, 박애정신은 지금이야 보편적인 가치이지, 차별이 당연시된 신분제 봉건사회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진일보한 생각이었다. 런 점을 고려하면, 순교자는 단순히 우리가 믿는 종교의 교리를 맹목적으로 신봉한 자가 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하고,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뜻을 지킨 이들이었다. 이처럼 순교자들은 현대의 가치인 평등, 박애를 추구하며, 조선 사회를 봉건사회에서 더욱 나은, 근대적인 사회로 이끌려고 한 자들이었다.

 우리는 지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한 이들을 민주화 투사로 기념하듯,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려 한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정신을 본받으려 한다. 또한 우리는 들의 행적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폭력의 전승이라고 하지 않는다. 순교자들을 역시리 교회가 기리는 것은 봉건사회에서 평등을 추구하여, 민주화 투사들처럼 사회를 나은 향으로 이끌려 한 이들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교회가 순교자를 기리고 본받도록 강조하는 것은 결코 강요된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끝으로 책을 덮으며, 오늘날의 순교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대한민국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누구도 이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초남이 부부처럼 목숨을 바쳐 내가 믿는 종교를 지킬 일은 더 없다. 그렇다면, 비로소 우리 시대에서 와서 순교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것일까. 순교를 사전적 의미로 목숨 바쳐 하느님과 내가 믿는 종교와 신앙을 지키는 것라고 해석하면 이것은 유물이 맞다. 그러나 내가 믿는 신앙과 하느님께서 중시하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재정의한다면, 순교는 지금도 필요하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 내 이웃과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 등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의 순교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치를 신앙인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조직 생활에서 나의 자리, 위치를 보전코자 남녀 차별에 동조하거나, 혹은 회사 또는 조직 내의 부당행위를 보고 모른척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부터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나에게 득이 되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금력과 사회적 배경을 먼저 보게 된다. 특히 배우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동반자로서의 배우자가 아니라, 배우자의 환경, 재력을 보고 판단하고, 주변인은 이렇게 배우자를 평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오늘날의 순교는 하느님의 가치를 저버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가치를 성경 안에만 두지 않고, 때로는 현실과 부딪히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한 번 더 력하는 것, 현실과 타협하지 못해, 내가 조직에서 하느님의 뜻을 지키다 내가 피해를 볼지라도, 한 번 더 참고 용기 내 현실과 싸워보는 것. 그것이 바로 순교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하느님과 멀어진 우리 사회에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살 것을 다짐하며 산을 이만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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